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사 폭동 (문단 편집) === 폭동 준비 === 6월 11일의 정치국 회의는 또한 홍군의 각 군단 수를 감축하여 4개 군단으로 통합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에 따라 마오쩌둥과 주더는 6월 13일 강서와 복건의 부대 전체를 통합시켜 2만명 규모의 1로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로군은 6월 19일 1군단으로 개칭되었다. 그 외에 [[린뱌오]]의 4군과 6군, 12군도 모두 1군단에 통합되었다. 마오쩌둥의 경우, 지난 1년간 강서, 복건, 강소로의 확장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이러한 제안은 중앙위원회의 반대로 부결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2월 초에 중앙의 노선과 별개로 강서성의 길안을 공격할 것을 결정한 상태였으며 중앙위원회가 강경해지는 것을 보고 상당히 흡족해했다. >"중국은 온 나라가 마른 나무로 뒤덮여 있으니 곧 세찬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 한점의 불꽃이 온 들판을 테울 수 있다는 중국의 옛말이 맞다. (...) 현재 상황은 해안가에 서서 멀리 바다를 바라볼 때 수평선 너머 돛대가 보이는 배와 같고, 높은 산마루에 서서 멀리 동녘 하늘을 바라볼 때 사방을 환히 비추면서 막 솟아오르려는 아침해와 같으며, 또한 그것은 어머니 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이제 곧 태어나려는 갓난아기와 같다." >---- >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 하지만 마오쩌둥은 [[농촌]]에서의 역량 확대와 [[유격전]]을 경시하는 리리싼의 관점에 반대하여 농촌을 가지고 도시를 [[포위]]한다거나 [[도시]]를 탈취하는데 [[홍군]]에 의지한다는가 하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리리싼은 마오쩌둥의 마오쩌둥의 주장을 '복싱 전술'이라고 비웃으며 묵살했다. 리리싼은 7월 13일 [[난징]] 폭동계획을 수립하고 [[우한]], [[상하이]], [[항저우]]의 폭동을 위해 준비사업을 실시하였다. 7월 16일 리리싼은 [[코민테른]] 주석단에 서한을 보내 "군벌 전쟁의 혁명전쟁으로의 전환", "난징, 우한에서의 폭동", "상하이에서 총동맹파업의 실행과 우한폭동의 우선적 승리를 통한 전국 소비에트 정권의 건립"이란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요청하는 한편 같은날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당조직을 통해 군중을 동원한 파업과 시위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7월 18일부터 23일까지 전국 조직공작 회의를 개최, 당 [[조직]]의 [[군사화]]를 결정하고 행동위원회를 성립하였다. 또한 리리싼은 [[펑더화이]], [[덩샤오핑]]의 홍군 3군단이 5군과 8군을 동원하여 우한-창사 철도를 차단하여 우한으로 진군하고 [[주더]], [[마오쩌둥]]의 홍군 1군단이 난창, 주장에 진입하여 장강을 차단하여 우한의 승리를 엄호, [[허룽]], [[윈다이잉]]의 홍군 2군단과 [[장궈타오]], [[쉬샹첸]]의 홍군 제4군단이 협동하여 우한을 공격하고 홍군 제7군이 류저우, 구이린, 광저우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리리싼의 지시를 받게 된 전국 각지의 홍군은 즉각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6월 21일에 리리싼의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가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인 6월 22일 난창과 주장 공격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